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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5대 문제점

2010.11.19 09:39 Jkun Story/뉴스 스크랩


출처 : http://hook.hani.co.kr/blog/archives/15706

 

프롤로그

광화문을 지키고 있던 이순신 장군께서 쓰러졌다.  1968년 4월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이 서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각가 김세중 측의 전언)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한복판에서 ‘온갖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던 이순신 장군은 ‘속이 썩어 붕괴 위험’에 처했고, 이에 장장 40일동안 입원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이순신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우리 어린이들이 존경하는 인물 1위인  그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인물’을 넘어 던지는 뭔가의 느낌이 있다. 그것은 패배와 설움에 북받혀 발버둥친 질곡의 조선역사가 남긴 ‘승리의 상징’, 부당한 권력과 권모술수의 책략을 뿌리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간 ‘올곧음’에 바치는 겨레의 찬사이다. 하물며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겨 종살이 생활을 40년 가까이 한 우리에게 그는 ‘구국과 항일’의 구심점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광화문에 금간 소식’ 보다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였을 거다.

며칠전 나는 울적한 마음에  광화문 이순신 동상에 문병차 가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사실 동상에 가까이 가서 살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새롭게 조성된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 이순신 동상 뒤편으로 다가선 나는 순간 충격에 비명을 지를 정도 였다.

   <박정희 헌납>

제작 관련 표기 – 박정희 헌납(맨 위줄)

 거기엔 그렇게 써 있었다. 나는 순간 사람이 있는줄 모르고 화장실 문을 잘못 열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 잡혔다. 헌납이란 단어는 천황폐하의 만수무강과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바쳤던 ‘비행기 헌납’같은 일들을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누구에게 이순신 장군을 헌납한 것일까? 설마 천황에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단어는 나에게 너무나 큰 놀라움을 던져주었다. 대통령 박정희도 아닌 개인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 동상’을 헌납했다면 대상은 누구였을까? 국가, 민족 뭐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비를 털어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혹떼러 갔다가 혹 붙인 느낌으로 더욱 울적해진 나는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따른 음모’ 뭐 이런 유언비어가 한때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군사독재를 위해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을 세웠다는 류의 그런 소문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순신 장군 동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다가 나는 정말 ‘광화문 동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 동상이 1980년 철거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77년 5월. 서울 시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고증 잘못이 지적되자 서울시가 ‘문화공보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시민들은 “성웅의 조상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느냐”라며 관계 당국을 성토했고, 서울시는 1979년 5월 문공부에 충무공 동상을 다시 만들어 세울 것을 요청해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펼쳐진 어수선한 정국으로 이 결정은 실행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동상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 동상에 대해 5대 문제점을 제기한다.

1977. 5.10일 동아일보 기사

1) 이순신 장군은 과연 항복하는 장군의 모습인가? 

이 문제의 핵심은 칼을 오른 손에 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모습이고 이는 항복한 장수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김세중측은 이점에 대해 “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 고 말하고 있다.그런데 이런 주장은 김세중이 조각을 조성할 때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영정과 바로 모순됨을 알 수 있다. 김세중이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조각할 때,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영정에는 이순신 장군이 칼을 왼손에 잡고 있다. 또한 광화문 동상이 아닌 이순신의 다른 동상 혹은 영정 그림 등과 비교할 때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발언이다.

 

 

이당 김은호 (이순신 장군 초상) 충무사 

 ‘갑옷만을 참조했다’는 김세중의 진술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왜고 “김은호의 영정과는 다르게 오른손에 칼‘을 잡은 모습을 표현했는가 하는 것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과연 김세중측의 말처럼 “ 전시가 아닌 평화의 시기”를 상징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인지, “단순한 작가의 불찰”로 인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2)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이다 

                

광화문 동상의 칼 모양                                           이순신 장군의 실제 칼 쌍용검의 모습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에 대해 김세중 측은 “ 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 ‘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또한 “칼이 한국의 검이냐 일본도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칼 자루에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적혀 있습니다.”고 말한다. 현충사의 이순신 장검이 지닌 본연의 의미,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강조되어야 하지 ‘일본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은 조선식 쌍수도(雙手刀)에 속하며 무예도보통지에 의해서 “장검. 용검. 평검이라고도 불리며, 칼날의 길이 5척, (동호인 1척), 자루 1척 5촌. 7척짜리도 볼 수 있다.” 고 정의되어 있다. 이 칼은 실전용이 아닌 의전용 칼이므로 길이가 1미터 97센티, 칼집에 넣었을 때는 2미터를 넘는 크기이다. 만약 이 칼을 짚었다면 당연히 키보다 높은 칼을 묘사해야지 허리정도까지 오는 칼로 표현될 수 는 없다. 허리에 차는 칼, 혹은 그보다 작은 칼을 묘사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패용한 실전용 칼 ‘쌍룡검’을 묘사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장검의 길이를 축소, 일본도를 만들어 놓고 ‘현충사의 칼’이 일본도 라는 변명은 받아 들이기 힘들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들고 있는 장검(長劍)은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길이뿐만 아니라 칼날의 곡률(曲率)을 보더라도 이충무공 장검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갖는데 반해서 세종로 동상의 장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3)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 ‘중국 갑옷’이다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 지고, 중국식 갑옷은 덮어 쓰는 형태로 만들어 진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져 있다는 점을 볼 때,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인 점이 명백하다.

 김세중측은 자신의 과오로 이순신 장군의 갑옷이 중국식으로 표현된 것을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의 고증도 얻은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김세중은 정확한 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고 그저 조선 왕릉의 무인석(武人石)  몇점을을 참조하여 만들었다는 소문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말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얻었다면 ‘이당의 초상이 중국식 갑옷임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동상이 얼마나 ‘객관적 고증과 연구’없이 진행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갑옷의 모습(좌),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어깨부분을 감싸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의 갑옷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중국갑옷은 피박(披膊)형 갑옷으로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위해 어깨 위로 두르는 일종의 망토형 방호구이다.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에서 인용

 4)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왜 표준영정과 다른가? 

 

광화문 동상의 얼굴              조각가 김세중의 얼굴 

광화문 동상의 얼굴을 놓고도 지적사항이 많았다. 특히 현충사에 걸려있는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김세중 측은 “ 장군의 실제모습을 전해오는 영정은 없으며,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신 이충무공의 영정이 1968년 광화문 충무공동상이 제작된 지 5년후인 1973년 이순신장군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고 변명하고 있다. 나아가 조각가인 김세중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에 아내인 김남조 시인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김세중은 조각상을 건립하면서 당시에 존재했던 이순신 장군의 영정중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충무공의 영정 동상 고증이 잘못 됐다(동아일보 1977년 5월 12일 기사) 좌로부터 현충사의 (장우성) 해남 좌수영 (이당 김은호), 한산도 제승당 (이당 김은호)

  위의 사진들은 당시까지 그려진 이순신 영정중의 대표작이고,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주요 장소에 실제로 걸려있던 영정이었다. 그런데 김세중은 이 초상중에 어떤 점도 참조하지 않았다. 특히 월전 장우성의 그림은 현충사에 53년도부터 봉안되어 있었고, 당시의 화폐 100원 동전, 500원 지폐 등에 사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월전의 그림도 조금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월전 장우성의 영정이 지닌 문제를 별도로 하고)

 갑옷의 고증을 통해 이당의 그림을 참조하고 있다고 밝힌 조각가가 얼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영정도 참조 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상, 초상화와 같은 작품은 ‘작가의 개성’을 억제,사실관계를 살피고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임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작업을 수행하지 않고 1973년에야 ‘표준영정’이 지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영정도 참고하지 않았다는 말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나아가 김세중측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초상화 혹은 동상을 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안중근 혹은 유관순의 얼굴을 그리거나 제작할 때, 제작자의 얼굴과 닮아 버린다면 ‘사실을 전달’하려는 제작의 목표와 심각하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김세중의 얼굴과 닮았다’는 의혹에 대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답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

5. 장군이 지휘하는 북은 왜 누워 있는가?

 

 누워있는 두 개의 북, 전투를 지휘하는 용도이다. 

전장에서 북은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의 지시이다. 이에 전장의 북을 ‘독전고(督戰鼓: 전투를 독려하는 북)’라고도 부른다. 평화시에도 북은 전쟁을 예고하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쓰인다. 설화에 나오는 ‘자명고(自鳴鼓 : 스스로 울리는 북)은 낙랑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국방의 상징이다. 그런데 광화문 동상 앞의 북은 옆으로 누여져 있다. 이는 전장을 독려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용맹한 이순신’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탄환을 맞은 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뒤, 조카인 이완에게 ‘계속해서 북을 쳐 전쟁을 독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면서 독전하기를 계속했다(『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 

 

노량해전도, 제승당 소장 

제승당에 걸린 ‘노량해전도’는 이런 역사적 전거에 입각해 북 옆에서 쓰러진 이순신 장군을 묘사했다. 물론 북은 똑바로 서서 언제라도 장군을 맞을 태세로 그려졌다. 

민족의 가슴 속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 최후의 모습, 혹은 불패의 장군의 모습을 묘사하지 못하고 북을 뉘어 ‘장군으로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 하지 못한 것은 최악의 실수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자료

동아일보. 1977. 5.10 (세종로 충무공 동상이 잘못 되었다- 다시 만들기로) 동아일보. 1977. 5.12 (충무공의 영정 동상 고증이 잘못 됐다)

 조선일보. 2009.1.31 (이순신 동상과의 대화… 김남조 시인에게 듣다 )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1/30/2009013001150.html

 동아일보. 2004. 10.9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칼은 일본도”)

 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10090054

 

재단법인 김세중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choongmoog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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